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성 로마 제국/오해 (문단 편집) === 이탈리아 === || [[파일:Iron_Crown.jpg|width=100%]] || ||[[롬바르디아 철관]]. [[로마왕]]이 [[이탈리아 왕국(중세)|이탈리아 국왕]] 대관식을 치를 때 쓰였다. || || [[파일:787px-Mitteleuropa_zur_Zeit_der_Staufer.svg.png|width=100%]] || ||[[호엔슈타우펜 가문]] 치하 신성 로마 제국과 [[시칠리아 왕국]]. 단, 시칠리아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해 있지 않았고 어디까지나 호엔슈타우펜 가문이 [[동군연합|따로 통치하는 독립된 영토]]일 뿐이었다.[* 유튜브의 유럽 역사 지도 영상을 보면 교황령 이남의 남이탈리아는 신성 로마 제국 색깔의 연한 색으로 표시되는 경우가 많다.] [[시칠리아 왕국]]과 [[베네치아 공화국]]은 신성 로마 제국을 표시하는 붉은 선 바깥으로 표시된 걸 알 수 있듯이 단 한 번도 신성 로마 제국의 영역에 들어간 적이 없다. || [[이탈리아 왕국(중세)|이탈리아 왕국]]은 [[독일 왕국]]과 함께 신성 로마 제국이 시작할 때부터 있었던 왕국이다. 신성 로마 제국 초기의 중세 황제들([[오토 왕조|작센 왕조]], [[잘리어 왕조]], [[호엔슈타우펜 왕조]])은 로마와 로마가 상징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의 [[가톨릭]] 신앙에서 정체성을 찾으려 했다. 거기다 위에서 밝힌 것처럼 이탈리아 지역은 경제적으로도 부유해서 제국의 재정에 큰 보탬이 되는 지역이기도 했다. 프리드리히 1세를 비롯한 초기의 많은 황제들이 이탈리아에 그렇게도 집착했던 이유는 교황과의 정치적, 종교적 갈등 때문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일부 중세 황제들은 로마에 집착하여 지나칠 정도로 이탈리아 경영에 골몰했지만 정작 이탈리아에서는 곤경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독일을 비롯한 중부 유럽을 평정하며 그 이름을 전유럽에 떨쳤던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황제도 이탈리아 원정에서는 무능할 정도로 연패를 거듭하며 망신을 당하고 말았다. 이탈리아 경영의 실패는 독일 국내 정치에서 제후들의 여러 도전과 위협으로 이어졌다. 강력한 황권과 진정한 신성 로마 제국을 추구했던 호엔슈타우펜 왕조 황제들의 황권은 [[프리드리히 2세]] 사후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고 결국 [[대공위 시대]]로 귀결되고 말았다. [[대공위 시대]] 이후 황권이 약해졌기 때문에 어느 한 가문에서 황제를 독점적으로 세습하지 못하고 [[합스부르크 가문]], [[비텔스바흐 가문]], [[룩셈부르크 가문]] 등이 한동안 번갈아가면서 황제를 배출했다. 이시기 황제들은 초기 황제들과 달리 독일 내에서조차 영향력이 미미했기 때문에[* 역으로 독일 내에서 한미한 세력이었기 때문에 황제로 선출될 수 있었다.] 독일 내에서 영향력을 확보하는데 주력했고 각각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은 [[스위스]]의 자그마한 백작 가문이었다가 [[루돌프 1세]]가 [[오타카르 2세]]를 패사시키고 [[오스트리아 공국]]과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을 회수하여 맏아들 [[알브레히트 1세|알브레히트]]에게 분봉하였기 때문에 초창기에는 이방인으로서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를 통제하기에도 벅찼다.],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의 영지는 [[팔츠 선제후국|라인 궁정백령]]과 오버바이에른 공국, 니더바이에른 공국으로 분열되었는데 [[루트비히 4세(신성 로마 제국)|루트비히 4세]]는 비텔스바흐 가문의 영지를 모두 통합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생전에 라인 궁정백령은 형 루돌프의 아들 루돌프 2세와 루프레히트 1세에게 물려주었고 그가 죽은 후 바이에른도 다시 분열되어 15세기 초 바이에른뮌헨 공작 알브레히트 4세에 의해 통합되기 전까지 갈라졌다.], 보헤미아[* [[룩셈부르크 가문]]은 [[룩셈부르크]]에 기반했으나 [[하인리히 7세]]가 아들 [[얀 루쳄부르스키|요한]]을 보헤미아 왕국 프르셰미슬 왕조의 마지막 혈손 엘리슈카 공주와 결혼시키면서 요한을 보헤미아 국왕으로 선출시킬 수 있었고 본토 룩셈부르크는 방계 가문에게 넘겨주면서 보헤미아 왕국으로 이주했다.] 등 자신들의 기반을 다지는데 주력했다. 그렇다보니 교황의 대관을 받으러 로마로 가는 것은 언감생심이었고, [[하인리히 7세]], [[루트비히 4세(신성 로마 제국)|루트비히 4세]] 정도나 교황의 대관을 받을 수 있었다. 분명 권위는 있으나 실익은 크지 않았던 이탈리아는 제국과 점점 멀어졌고[* 훗날 기반을 다지는데 성공한 [[카를 4세]]는 로마로 가서 교황이 주관하는 대관식을 치렀고, [[루프레히트]]도 꾸준히 로마로 대관식을 치르러 가려 했으나 북이탈리아 세력에 막혀 번번히 실패했다. 대공위 시대 이후 황제들이 결코 북이탈리아에 대한 관심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14~15세기 신성 로마 제국은 북이탈리아 지역의 영토와 영향력을 상당 부분 상실하게 되어 이탈리아는 명목상으로만 제국의 봉토로 존재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5세기 중반부터 신성 로마 제위를 독점적으로 세습하게 된 합스부르크 왕조는 아예 국호를 '''독일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이라고 바꾸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